밀리터리2017. 9. 13. 07:00


이민자의 나라로 성장한 미국은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력의 최고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었으며 러시아와 독일의 뒤를 이어 미국은 4번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벌어진 1차대전과 2차대전에서 직접적인 참전을 피했고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을 때 비로서 참전을 결정하면서 승리만을 맛보았습니다. 두번의 세계적인 전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면서 2차대전 이후로 서방의 첫번째 군사대국으로 성장합니다.





동구권을 중심으로 한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며 냉전시대를 열게 되었고 혼란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개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미군이 주둔을 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는 소련과 함께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의 강도가 높았습니다.


동북아시아 정세에 어두웠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태평양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대부분의 결정을 맡겼고 맥아더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 비해 동북아시아 정세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미국은 어지러운 한반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지 않았고 남침 야욕을 가지고 있는 김일성과 뒤를 봐주고 있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이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남침계획을 전달했고 스탈린은 철없이 덤벼대는 김일성을 달래기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소련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남침에 대한 확신을 들어낸 김일성에게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할 수 는 없었습니다.





김일성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전달되던 시기 미국 국무장관 딘 에치슨은 공개적인 기자회견에서 동북아시아의 미군 방어선인 '에치슨라인' 에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공표하였습니다. 남침의 기회를 옅보는 김일성에게 부여된 당위로 스탈린은 설득되었고 '한국전쟁' 이 발발합니다.


제대로 된 무기 조차 없었던 한국군은 3일만에 수도를 빼앗겼고 북한군의 첨단화 된 전력에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UN군이 급파되면서 급한 불이 꺼졌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면서 김일성의 야욕은 쉽게 꺾일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후로 3년을 끌려간 한국전쟁은 미군에게는 지옥과 같은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겪은 미군이지만 개마고원의 혹한과 같은 험준한 지형에서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산악지형을 위주로 전투를 치른 제 10 산악사단 조차 최악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밀려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 제 1 해병사단이 전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면서 굴욕을 겪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전쟁이 후기로 접어드는 1차대전과 2차대전과는 수위가 달랐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서 전투를 해본 경험도 전무했기 때문에 미군의 기억에는 한국전쟁이 최악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들은 최근 북한의 도발이 수위를 넘어서면서 2차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치러진 한국전쟁을 1차 한국전쟁으로 표현하면서 다시 한 번 '지옥 문' 이 열릴 수 있다는 불안한 표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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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