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7. 31. 07:00


폴란드침공으로 2차대전을 시작한 아돌프 히틀러는 오랜 숙적인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철통같은 마지노선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일대를 둘러싼 마니노선은 의외로 간단하고 쉬운 이전의 전술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전격전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지휘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벨기에 아르덴지역을 우회하는 '낫질작전' 을 입안했고 히틀러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야전사령관이었던 만슈타인은 육군 참모총장에 오르는 것이 꿈이었고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전격전을 바탕으로 감행한 낫질작전은 프랑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도버해엽을 건넜던 영국군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육군력에서는 최고라는 프랑스가 어의없이 무너지면서 사기는 바닥이었고 독일 기갑부대는 파죽지세였습니다.





선봉에선 하인츠 구데리안은 그의 별명인 '재빠른 하인츠' 를 증명하고 싶은 듯 프랑스와 영국군을 덩케르트까지 몰아붙였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항구인 덩케르크 뒤에는 푸른 바다였기 때문에 연합군은 몰살 직전이었고 독일의 유럽 제패는 현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실패한 연합군은 공포에 떨고 있었고 선봉에 선 하인츠 구데리안은 승리를 만끽하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완벽한 조합이었지만 덩케르크를 15km 앞둔 상황에서 진격을 멈추게 됩니다.


히틀러는 기갑부대가 연합군에 포위되어 고립될 것을 염려하였고 육군 총사령부는 히틀러의 걱정을 지나친 우려라고 일축했습니다. 기갑부대와 보병부대의 간격이 넓어져 있었고 보급선이 길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우려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야전사령관들도 육군 총사령부의 판단이 낙관적이라고 비판했고 히틀러의 손을 들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영국군을 궁지에 몰아넣고도 히틀러는 기갑부대에게 장비를 점검하고 휴식을 가지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룬트슈테트와 구데리안은 폭우로 인해 유실된 도로사정을 이유로 결정에 찬성하게 됩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독일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기갑부대보다는 공군력을 동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효율이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를 설득했고 히틀러는 괴링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융커스 Ju 88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를 동원한 루프트바페는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인 '다이나모' 를 준비하던 영국군은 함선과 화물선, 어선을 비롯해 바다에 뜰 수 있는 요트까지 동원하여 영국군의 철수를 지원하게 됩니다.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영국군에 비해 독일은 U 보트 위주의 잠수함 밖에 없었기에 다이나모 작전의 성공은 낙관적이었습니다.


철수작전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괴링의 계획은 영국군 전투기 스핏파이어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서서히 퇴색되었고 '다이나모 작전' 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338,000여 명의 영국군이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10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눈앞에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덩케르크에서 히틀러는 커다란 오판을 내리고만 것입니다. 덩케르크부터 육군의 일부 장성들은 히틀러의 군사전술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훗날 불신이 싹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주도한 암살작전 '발키리' 의 원인이 됩니다.





히틀러는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도 영국을 가장 두려워하였고 프랑스침공에서 파죽지세였지만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하인츠 구데리안 빠른 진격과 길어진 보급선, 헤르만 괴링의 제안을 핑계로 들었지만 영국을 밀어내는 것에 안도를 했습니다.





도버해엽을 건너기만 하면 다시 서부전선으로 영국군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대부분의 중화기가 덩케르크에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판단이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이후 미국이 장비를 지원하고 유럽전에 직접 참전할 것까지 계산할 수 없었다는 것이 히틀러에게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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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