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7. 9. 07:00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보급로를 차단한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해야 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지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실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도로사정은 안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주도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북진을 위해서는 원산으로 재상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울로 진격한 10군단을 인천으로 되돌려 수송선에 태웠습니다. 원산 앞바다는 이미 수많은 기뢰로 접근 조차 불가능했고 일본에서 출항한 소해선이 1달 여의 작업을 한 뒤에야 상륙이 가능했습니다.


한국국이 이미 육로를 통해 원산을 지나갔기 때문에 원산 상륙작전은 인천 만큼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미 8군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지휘부의 요청에 맥아더는 승복하지 않았고 미 10군단과 9군단에 속한 1 해병사단을 별도로 운용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아젠하워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며 자신을 앞서나가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맥아더가 벌인 자충수로 평가되는 대목입니다.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 사이를 중공군이 가로질러 후방으로 전개하면 연합군은 꼼짝없이 포위될 위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뒷 날 해임의 사유가 될 지 몰랐다...)




1950년 10월 초 개마고원까지 전진한 미 10군단은 추위가 닥치기 전에 전쟁을 끝나고 싶었지만 바램과는 다르게 중공군 12만 명이 개입하면서 전선의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합니다. 전선에서 밀려내려가는 미 8군과 연합군은 흥남에서 철수를 결정하였고 중공군의 압박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민간인 10만을 포함한 20만의 대이동이 흥남 철수작전의 성공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개마고원 아래 지역의 장진호 인근은 11월이었지만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을 기록했고 시속 60km의 강풍은 모든 것을 얼려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1 해병사단은 2차대전에서 산전수전을 다겪은 역전의 용사였지만 개마고원 일대의 극심한 추위에서 전투를 치른 경험은 없었습니다. 단단하게 언 땅은 참호를 팔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 막사 내로 칼바람이 들어와 잠을 이룰 수도 없었으며 각종 장비의 오일이 얼어붙기 일쑤였습니다.





다수의 전투에서 전과를 가진 중공군 9병단에게도 살을 에는 추위는 생사를 넘나들었고 전투를 해보기도 전에 동사로 사망하는 병사가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9병단은 파죽지세로 장진호로 밀려내려왔고 제 1 해병사단은 포위되어 생사에 기로에 섰지만 지휘관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 은 침착하게 대응을 했습니다.


빠른 진격을 원했던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와는 달리 퇴각을 염두해서 서서히 북진한 스미스 소장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하갈우리에 진지를 만들어 헬리콥터를 통해 보급을 원활하게 하면서 꼬였던 행보가 풀어졌고 부상자를 후송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겼습니다.





중공군 9병단에 의해 장진호 일대에서 포위 당한 1 해병사단은 12월이 될 때까지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벌었고 구사일생으로 퇴각작전에 성공하면서 흥남 철수작전이 성공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미 해병사단의 전사상자는 3,637명이었고 대부분이 동사자인 비전투전사상자는 3,657명이었으며 중공군 9병단은 12만 중에서 25,000이 전사했고 12,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중공군 전사자의 상당수가 동사자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연합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후퇴를 결정했지만 중공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한동안 진격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본이 제작한 지도밖에 없어던 시절의 명칭인 Chosin(초신) 전투는 해병대에게 여전히 참혹한 전투로 기억되고 있으며 생존자 모임인 "Chosin Few" 에 의해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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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