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5. 21. 07:00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인 1차대전이 마무리 되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군사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으며 승전국들에게 엄청안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압박이 늘어나면서 독일 국민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으며 민족주의가 팽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여 막강한 군사력으로 주변국을 압도하는 것이 새로운 로드맵이라고 믿었던 민족주의는 철저하고 냉정하며 합리적인 독일 국민을 일순간 나락으로 빠뜨기게 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부끄럼 많은 청년 아돌프 히틀러는 민족주의를 부르짓으며 선봉에 서게 됩니다.





나치당의 총수가 된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설득하고 결집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1차대전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육군 장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해군 사령관 칼 되니츠는 스스로가 해군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공군 사령관이자 나치의 2인자로서 비서 마틴 보르만과 함께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고 전쟁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칼 되니츠는 뼈속부터 군인이었지만 괴링이나 보르만은 권력을 뒤에 업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는 소인배였습니다.





1차대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맞서면서 고전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미리 맺어두면서 서부전선에 집중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혼란한 소련보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이 부담스러웠고 두려움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당시 군사력으로는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프랑스 육군은 유럽 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개발된 르노의 전차를 앞세운 프랑스 육군력은 히틀러도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였고 육군 장성들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병력과 개인 화기의 우세로 전장의 승패가 가늠되던 이전의 전투와는 달리 독일은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운 전격전을 구상하고 있었고 문제로 떠오른 것은 연료 보급이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석유 보유량이 줄어들 것이고 보급에 따라 승패가 나뉘게 될 것이 불보듯 뻔했습니다.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전차, 전투기, 수송기, 잠수함의 연료는 모두 석유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으로 코카서스 지역의 유전은 넘볼 수가 없었고 중동의 유전도 확실하게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민은 깊어져 갔습니다.





히틀러의 고민은 뛰어난 기술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독일의 우수한 개발자들에 의해 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석유 정제보다 쉬운 석탄 액화기술을 발견한 개발자들 덕분에 히틀러는 석유에 대한 고민을 접을 수 있었고 유럽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석유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고전한 것과는 달리 수많은 전차를 이용하여 유럽 전장을 누볐음에도 독일군은 연료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고 군대를 분할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유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히틀러가 교만해지고 육군 장성들의 의견을 무사하기 전까지 독일은 오롯이 전투에서만 전념할 수 있었고 프랑스까지 침공하여 승리를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액화석유가 독일의 최대 장점이라는 것이 연합군에 알려지기 전까지 히틀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루 생산량이 12만 배럴에 이를 정도로 액화석유 기술이 발전하였던 독일은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가면서 액화석유 공장들이 차례대로 파괴되었고 5천 배럴로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위대한 기갑 전력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패망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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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