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5. 15. 07:00


미국은 700조가 넘는 국방예산을 책정하며 세계의 보안관을 자처했고 냉전 이후로 경쟁상대 없이 최고의 군사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편성된 정규군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특수임무를 위한 특수부대의 규모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대테러임무와 특수전을 위한 임무에 따라 부여된 작전의 특성과 인원이 다르기에 특수부대를 다양하게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미국이 참여했지만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한 작전도 있습니다.






독수리 발톱 작전


Operation Eagle Claw 로 불린 특수임무는 델타포스의 창립과 함께 주어진 첫번째 실전 투입으로 관계자들과 미 국방성의 촉각이 집중된 작전이었습니다. 친미적인 이란 팔리비왕조가 권력 타툼에서 밀려나며 미국으로 망명을 원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반미감정이 높았던 이란은 미 대사관을 점령하고 대사관 인원을 인질로 삼았고 델타포스와 그린베레가 합동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복잡하게 설계된 작전도 문제였지만 이란 내 정보기관 CIA가 한 명도 상주하지 않아 정확한 상황을 몰랐고 각 군이 개입하면서 작전 규모가 급격하게 커졌습니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이집트에 모여 이란으로 향하던 델타포스는 이란 대사관으로 강습할 CH-53 수퍼스탤리온을 기다렸지만 야간 공습에 취약한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모래폭풍을 만나 흩어졌고 고장을 일으키며 작전이 취소되었습니다. 돌아오던 차에 공중급유를 받던 헬리콥터와 C-130가 충돌하면서 동반 추락하였습니다.


델타포스는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억울하게도 데뷔와 함께 실패한 실적을 남기게 되었고 합동특수전사령부(JSOC)과 네이비씰 6팀(후일 데브그루)이 창설되는 계기가 됩니다.






절박한 분노 작전


1983년 10월 미국은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그레나다가 쿠테타를 일으킨 것에 격분했고 "제 2의 쿠바"가 될 것을 우려했으며 강한 위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레나다에는 소련, 북한, 동독, 불가리아, 리비아의 군사고문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공산화가 일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월남전 이후로 최대 규모인 7천 여명의 미군 레인저, 해병대, 데브그루, 델타포스가 총출동하였고 공군의 지원과 해군 병력까지 급파되었습니다. 물량공세를 앞세운 미국의 앞도적인 승리로 끝이나기는 했지만 19명의 사상자가 생긴 미국의 피해도 중대했습니다.





그레나다 침공은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오판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13명이 특수부대원이었고 3명은 해병대원으로 추락한 블랙호크 3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로 군대 통솔에 대한 합동 법령인 골드워터 니콜스가 제정되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고딕 서펀트 작전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미국은 Operation Gothic Serpent 를 수행하였고 민병대 지도자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수뇌부를 체포하기로 합니다. 윌리엄 F. 게리슨 장군 휘하의 75 레인저와 델타포스, 데브그루가 일부 참여했고 인원 수송은 블랙호크가 담당했습니다.


모가디슈 중심에서 열리던 회의에 참가한 파라 아이디드의 참모 오마르 살라드 엘미와 정치고문 모하메드 하산 아왈을 체포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민병대에게 RPG로 블랙호크가 피격되면서 지상군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30분으로 예정된 작전은 새벽을 넘기게 됩니다.





곤역을 치른 미군 정예와 특수부대는 다음 날 새벽까지 소말리아 민병대와 대규모 교전을 펼치게 되었고 파키스탄 다국적군의 도움으로 날이 새고서야 모가디슈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소말이아 내의 미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소말리아 내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내전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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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