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30. 07:00


일찌감치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 현대화를 시도한 일본은 군사강국으로 1차대전에 참여했으며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육군을 주축으로 한 일본 군부에는 파벌이 형성되면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천왕 중심으로 개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보수적인 세력인 황도파와 자본주의와 입헌군주제의 중심에 군부가 있어야 한다는 통제파의 대립은 첨예해졌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으면서 2.26 쿠테타 사건을 일으킨 황도파가 거세되고 통제파가 득세를 하게 됩니다.





통제파의 주요 일원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아버지부터 군인집안에서 성장했으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한직을 나돌다가 헌병대사령관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주관하기도 하며 권력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통제파가 기득권으로 올라서면서 도조 히데키는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했고 일본 군부와 내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외무대신과 협력하여 나치 독일,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함께 동맹을 약속한 삼국 동맹 조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내각총리로 임명된 도조 히데키는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고 일본 군부 내에서도 무능하기로 소문난 무타구치 렌야와 츠지 마사노부를 최측근으로 삼았습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을 침공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인 군부의 중심에는 도조 히데키가 있었습니다.


중국을 침공하고 정복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전쟁이 아니라는 도조의 생각과는 다르게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병하면서 장기전으로 흐르게 되었고 인도차이나에서 군수물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실권을 가진 미국의 협력을 요구했지만 부정적인 답변을 받습니다.





도조 히데키는 군부에게 태평양 전쟁에 대한 기획을 입안했고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됩니다. 미국과의 개전을 위해 쇼와 덴노를 직접 설득하기에 이르렀지만 중일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과 개전하는 것에 스스로는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전선이 갈라지면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입안한 태평양 전쟁을 다시 접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게 됩니다. 진주만을 공격 당한 미국은 도조의 예상과는 달리 참전을 결정하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해군 수뇌부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해군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비롯한 태평양 함대의 해군 지휘관들은 역량이 있었지만 지휘부인 육군 출신의 도조 히데키에 대한 신뢰는 그다지 두텁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올릴 때도 중요한 사항은 누락시키는 경우가 허다했고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도조는 스스로를 육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총리를 겸한 군수 대신, 육군 대신, 상공 대신, 문부 대신, 외무 대신, 내무 대신을 겸하게 됩니다. 육군참모총장겸 국방장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미래창조과학부, 행정차치부, 기획재정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인 셈입니다.





모든 권력을 차지한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입지가 좁아졌고 군부는 광기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마라" 는 전진훈을 강요하면서 전장에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피를 강요했습니다.


정작 자신의 3명의 아들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무타구치 렌야가 버마에서 벌인 대표적인 뻘짓 임팔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것을 알고도 심복을 밀어주기 위해 승인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곳곳에서 저질렀습니다.





해군 뿐 아니라 육군에서도 사이판 전투에 패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총리직에서 사임하였으나 꼭두각시로 내세운 고이소 구니아키 뒤에서 여전히 실권을 지속했습니다. 군부와 함께 항전을 외치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두들겨 맡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가슴에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절명하지 않고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재판 전까지 극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병사들에게 생포되지 말라고 전진훈을 강요한 것과는 상반된 행보를 걷다가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재판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쇼와 덴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죄 밖에 없다고 항변하였고 일본 국민에게도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으나 전범들을 기리는 순국 7사묘를 세우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합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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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