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26. 07:00


2차대전을 겪은 유럽과 세계 각 국은 전쟁에 대한 피로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서히 자리를 잡으면서 대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의 많은 나라들이 독립과 함께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동구권의 일부 국가들이 소련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가 양립하고 있었으며 서로간의 대립으로 폭발직전의 상태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체제의 대립에 휘말리게 되었고 혼돈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소련의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은 전후 영토분할에 대한 논의를 거쳤고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은 북쪽은 소련의 군정하에 있게 되었고 남쪽은 미국의 군정하에 전후 복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 딘 엣치슨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방위할 수 있는 선을 알류산 열도와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연결한다고 기자들에게 밝혔고 "엣치슨 라인" 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김일성은 남침의 야욕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48번이나 전쟁에 대한 결정을 종용했으나 스탈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독일과 치른 독소전쟁으로 수많은 병력을 잃었고 전후 복구가 시급한 상황에서 다시 전쟁을 치르기에는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엣치슨 라인이 발표되면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호소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총사령관 테렌티 스티코프의 도움으로 소련에서 T-34 탱크, 다연장 로켓 발사포 BM-13 카츄샤를 지원받게 됩니다. 항공기 170대까지 지원 받은 북한의 전력은 탱크와 전투기가 전무했던 남한과 현격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주둔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급하게 한국으로 파견되기는 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오는 북한의 전력을 막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UN은 다시 발발한 전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세계 각 국에 파병을 요구했고 한반도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빠르게 파병을 의결하고 결정했으며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등의 회원국들은 적극적으로 참여를 원했습니다. 김일성이 뒤에는 스탈린과 모택동이 있었고 직접적인 참전을 보류하면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것에서 진전하지 않았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이었던 소련의 대표는 한국전쟁이 북침이었다고 주장했다가 한국 대표 장 면이 제시한 소련제 돌격소총을 보고 북침주장을 거두었습니다. 장 면에게 욕설을 퍼붇는 소련 대표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견을 피력했으며 소련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연합한 국가들의 이익이 맞물려 벌어진 전쟁이었다고 하면 한국전쟁은 체재의 대립에 의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영토에 두개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상황이었고 뒤로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로감을 가진 양국이기는 했지만 서로의 자존심과 체제의 경쟁의 중심에 선 한국을 포기할 수 없었고 동북아시아의 작은 반도는 시대의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체제의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냉전시대가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었으며 체제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졌습니다. 미국은 동구권과 아시아에 번져가는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과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게 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