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23. 07:00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을 구할 수 있는 희망으로 떠올랐고 독일 국민의 대대적인 호응을 얻으며 나치당과 독일 최고의 권위에 오르게 됩니다. 유럽을 점령하고 싶은 야욕을 숨긴채 군비확장에 주력했고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시작됩니다.





미국은 1차대전에 받은 피해로 피로감에 젖어있었고 유럽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택하면서 군수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공황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아니라 2차대전의 발발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뉴딜정책의 성공 여부를 차지하고서라도 미국은 2차대전 초기 독일에게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지원했습니다. 육군이 강세인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지키며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우회를 상정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의 낫질작전으로 손쉽게 점령 당하게 됩니다.





유럽의 전쟁은 점입가경이었지만 미국은 참전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고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게 됩니다. 기습공격으로 자존심을 다친 미국은 2차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유럽과 태평양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며 2차대전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지부진하던 유럽전선은 노르망디 작전으로 반전의 물고를 텄지만 독일의 참모들은 여전히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 전력은 굳건했습니다. 소련이 동부전선에 선전하고 있었고 바그타리온 작전으로 수세로 몰아넣으면서 연합군의 전선이 우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매 순간 연합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전세가 독일에게 불리해짐에 따라 독일보다는 소련의 행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견제를 늦추지 않게 됩니다.


마켓가든 작전으로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라인 강을 건너 독일을 점령하고 유럽전쟁을 끝내겠다는 포부는 사라지고 1945년이 접어들 때까지 베를린으로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파죽지세로 전진하는 소련군과는 확실히 엇갈린 행보였습니다.





전쟁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연합군보다 소련군의 위세가 강했고 독일을 소련에게 모두 넘겨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습니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군사적인 우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위기감에 처했고 대규모 폭격 작전을 수립하고 시행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도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처칠과 루즈벨트에게는 전후에 처할 독일의 영토분할에만 관심을 쏠려있었습니다. 얼마 후 열리게 될 소련과의 3자회담 얄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선택지는 엘베 강의 피렌체 "드레스덴"이었습니다.





드레스덴은 함부르크와 베를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수공장이 적었지만 베를린을 100km 앞에 둔 소련군의 시야에 좋은 위치였습니다. 드레스덴을 향한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는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고 75만 발의 폭탄이 땅위로 떨어졌으며 그 중 40%는 소이탄이었습니다.


드레스덴에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는 6,000여 명 밖에 되지 않았고 25,000여 명은 폭탄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폭격에서 멀어져 있던 드레스덴은 100km 밖의 소련군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화염이 높았고 폭격소리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얄타회담에서 처칠과 루즈벨트의 고민과는 달리 스탈린은 독일 영토분할에 쉽게 합의했고 많은 조건을 수용했습니다. 스탈린은 대규모 병력의 손실과 전후 재건에 대한 고민으로 독일 영토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처칠과 루즈벨트의 우려는 괜한 고민이었습니다.


독일의 처리에 관심을 집중하느라 놓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영토 반환으로 훗날 공산화가 진행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소련에게는 히틀러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고 연합군은 소련의 행보를 주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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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