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2017. 4. 21. 07:00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앞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면서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갖기 시작합니다. 1차대전에서 영국의 지원하에 중국과 러시아에 맞섰고 군사력의 압도를 보이며 패권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도 태평양에서 강자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상대가 될 수 있는 국가가 없었고 태평양에서 맞선 미국은 가쓰라 테프트조약으로 이미 불가침에 가까운 암묵적인 동의를 했습니다.





중국을 침공한 일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세하여 거세게 항전하면서 입장이 달라졌고 모자란 보급과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인도차이나 앞에 위치한 필리핀은 미국의 요충지였고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합니다.


하와이의 군사적 요충지 진주만을 대규모 기습 공격하여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미국 참전이라는 불상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은 미국을 앞도할 수 있는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부의 자신감은 넘쳤습니다.



일본 주력 항공모함 아카기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위세를 떨치던 일본은 영국이 유럽에서 고전하고 있는 틈에 영국령인 호주에 눈독을 들이게 됩니다. 호주 인근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과 같은 기습을 계획하고 해군 전력을 다시 한 번 집결하게 됩니다.


진주만을 공습했던 나구모 주이치 제독과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를 당해낼 수 있는 전력이 태평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군부는 낙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노후된 전력으로 겨우 호주의 인근을 순찰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습니다.





영국은 영국령인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에서 많은 병력을 착출했지만 북반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호주 본토는 침공당한 경험이 전무했습니다. 2차대전 한복판에 위치한 영국은 주변을 레이더로 감싼지만 호주에는 변변한 병력과 레이더가 없었습니다.


태평양에서 최고라고 불리우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소풍을 떠나듯이 호주로 향했고 여전히 진주만 공습에서 회복하지 못한 미 해군은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진주만을 공습한 지 2달 밖에 안되는 1942년 2월 19일 일본 주력함대는 호주 북부에 위치한 공군부대 다윈 포트로 향했습니다.



다윈 공습



전쟁과는 동떨어진 호주는 제대로 공습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으며 연합군으로 배치될 병사들만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티모르와 자바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호주에 정박하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 키티호크를 견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규모 공습을 위해 일본 전투기 제로센이 출격했고 선봉에는 진주만에서도 활약했던 베테랑 지휘관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있었습니다. 멜빌 선의 해안감시대가 "대규모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두 번이나 알렸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준비를 전혀하지 않았습니다.





30대 밖에 안되는 P-40 워호크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45척의 함선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다윈 공습으로 300여 명의 병력과 시민이 사망하였고 4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생각보다 허술한 호주 주둔군의 반격을 보고 일본은 "뭐지..??" 라는 반응을 했을 정도입니다.


주력군이었던 나구모 주이치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할 필요도 없이 공습은 마무리되었고 인도차이나를 향한 일본의 발걸음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윈 공습 이후로 1년 동안 일본은 100여 차례의 공습을 감행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미드웨이에서 침몰하는 카가



나구모 주이치의 항공모함 주력 선단 아카, 카가, 히류, 소류는 미드웨이해전에서 모두 침몰하면서 일본이 몰락하는 대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다윈 공습을 배경으로 제작된 오스트레일이라에서는 배우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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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원초적한량